▶ 글 싣는 순서 |
① "올 여름 전기세 5만 원…지구를 위한 응답이에요" ② "기후위기, 혼자 아닌 함께"…순천생태학교 '첫 발' ③ "이렇게 하면 바뀌겠죠" 효천고 기후환경 동아리 '센트럴' ④ 뚜벅이 환경공학자의 '자동차와 헤어질 결심' ⑤ "지구를 향한 작은 발걸음, 순천에서도 울리다" ⑥ 냉난방 없이도 가능한 삶, 순천 사랑어린학교가 살아가는 법 ⑦ 기후위기 대응, 급식에서 시작하다 ⑧ 버려질 뻔한 병뚜껑, '플라스틱 대장간'에서 변신하다 ⑨ "노플라스틱 육아, 가능해?" 환경 덕후 엄마의 실천법 ⑩ "손은 아프지만, 지구는 웃는다" 종이팩을 살리는 카페들 ⑪ '지금 바로 여기'…작은 극장에서 시작된 기후 연대 ⑫ 텀블러 500개, 쓰레기는 바나나 껍질뿐 ⑬ 기후위기 시대의 여행법…"멈출 수 없다면, 느리게 천천히" ⑭ "꽃을 보니까, 지켜주고 싶어졌어요"…기후위기 시대, 아이들은 이렇게 자라고 있다 ⑮ "가져와요 플라스틱 지켜가요 우리바다"…바다를 살리는 시민들 ⑯ 차 없이도 괜찮은 도시를 만드는 사람들 ⑰ 김밥을 말며 아이들이 배운 건? '생태감수성' ⑱ "기후위기, 동물도 아픕니다"… 동물권 다룬 기후영화제 열린다 ⑲ 영화 <플로우> 본 아이들…"기후위기, 혼자선 못 이겨요" ⑳ "골칫덩어리 전선 뭉치들, 버리지 말고 가져오세요" ㉑ 차 대신 버스, 민혜씨의 선택 (계속) |
버스를 타러 가며 양산을 든 채 이동 중인 이민혜씨. 박사라 기자 지난 16일 아침, 전남 순천시 풍덕동 버스정류장에서 이민혜(39)씨를 만났다. 두 개의 가방을 어깨에 멘 그는 별량으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 있지만 대부분의 이동은 대중교통에 의지한다. 더 시원하고, 더 여유롭고, 때로는 사람 냄새가 묻어나는 길 위에서 오늘도 그의 하루가 시작된다.
버스, 이 좋은 걸 왜 안 타요
"누군가 그러더라고요. 너희는 몇 천만 원짜리 차를 타고 다닐 때 나는 몇 억짜리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고요. 맞는 말이에요. 저는 지금 수억 원짜리 버스를 타고 다니죠. 버스가 얼마나 튼튼하고 넓어요. 여름에는 차보다 훨씬 시원하고, 요즘엔 와이파이까지 돼서 업무도 볼 수 있으니 안 탈 이유가 없죠."
도심에서 차로 20~30분이면 닿는 별량까지 하루 네 번 버스를 왕복하는 게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름엔 버스가 제일 시원해요. 가는 길에 노트북을 켜고 업무도 보고, 책을 읽기도 하고요. 요즘엔 일부러 핸드폰을 덮고 사람들을 관찰해요. 표정과 모습에서 인간 냄새가 느껴지거든요."
버스를 생활을 중심에 두게 된 건 어린 시절의 습관에서 비롯됐다. 11살 아이를 키우는 지금도 운전이 필요한 순간은 있지만, 정말 급할 때만 택시를 타고 돌아올 때는 버스를 이용한다.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니고, 자전거로 버스가 많은 정류장까지 이동하기도 한다.
"어렸을 때 엄마가 장을 보면 무겁잖아요. 그런데도 차가 있는데 안 끌고, 택시도 안 타고 꼭 버스를 탔어요. 우리는 투덜거리면서 따라다녔는데, 그게 습관처럼 몸에 밴 것 같아요. 몸은 힘들어도 공익적으로 좋다는 걸 자연스럽게 배운 거죠. 지금도 버스를 타는 게 번거롭고 싫다기보단, 탈 수 있으면 타는 게 좋다, 이런 마음이에요."
버스정류장에서 버스 도착 시간을 애플리케이션으로 확인하는 민혜씨. 박사라 기자 탄소의 진짜 주범은 자동차
지난해 여름 참여한 녹색전환연구소의 '1.5도씨 라이프 스타일로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이 그의 삶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됐다. 하루 동안의 활동에서 나온 탄소 배출량을 계산해보니, 한 달에 몇 번 쓰지도 않는 자동차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컸다. 플라스틱을 수십 번 덜 쓰는 것보다 자동차를 한 번 덜 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자동차에서 발생하는 탄소가 엄청 많더라고요. 장바구니나 텀블러로 줄일 수 있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컸어요. 그걸 보고 다른 것도 중요하지만 자동차를 지금보다 덜 타야겠다고 생각했죠. 예를 들어 환경을 생각해 장바구니 들고 시장에 가더라도 차를 몰고 가면 오히려 더 환경에는 좋지 않은 거예요."
그는 차라리 비닐봉지를 쓰더라도 걸어서 장을 보는 편이 탄소 배출을 줄이는 데 낫다고 생각했다. 눈으로 확인된 수치는 그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예전에는 쓰레기를 줄이는 데 관심이 많았다면, 이제는 탄소 자체를 줄이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민혜씨의 가방 속을 살짝 엿보니 생활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일회용 빨대를 대신할 다회용 빨대와 포크, 장바구니, 양산, 손수건, 제과점에서 빵을 담아올 수 있는 천 주머니, 자바라 물통까지. 가방 속에는 일회용품이 단 하나도 없었다.
교통뿐 아니라 쓰레기 문제에도 그는 '집착'에 가까운 실천을 이어왔다. 자기 쓰레기뿐 아니라 이웃의 쓰레기까지 챙겼다.
"2021년부터 1년 동안 아파트 분리수거장에 우유팩 수거함을 직접 설치했어요. 바구니를 하나 두고 '씻어서 넣어주세요'라고 써놨죠. 사람들이 넣어주면 제가 다 씻고 말리고 펼쳐서 우유팩 정거장인 유익한 상점이나 한살림에 가져갔어요. 많을 땐 바구니가 가득 차기도 했죠. 아이랑 같이 씻을 때도 있었고요."
분리배출에 대한 그의 설명은 꼼꼼했다. 충전식 기구는 그냥 버리면 화재 위험이 있으니 반드시 소형가전 수거 시스템이나 폐건전지함에 넣어야 한다. 택배 상자 송장은 떼어 먼지나 머리카락을 청소할 때 쓰고, 아이스크림 비닐은 가볍게 헹궈 버린다. 그는 "깨끗하게 씻을 필요는 없고, 소금기만 없으면 된다"고 했다.
또한 그는 구멍 난 양말을 꿰매 신었고, 엄마가 아가씨 적에 입던 치마를 다시 손질해 입었다. 고장 난 우산도 고쳐가며 오래 쓴다. 버리고 새로 사는 게 더 쉽지만, 고쳐 쓰는 것이야말로 진짜 리사이클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민혜씨의 가방 속에는 일회용품이 하나도 없었다. 사진은 그가 매일 들고 다니는 다회용 빨대와 포크, 빵 주머니. 박사라 기자 자전거, 목숨 걸고 타야 해요
대중교통을 꾸준히 이용하다 보니 순천시가 표방하는 '대자보(대중교통·자전거·보행)' 도시로 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자연스레 보였다. 그는 주저 없이 자전거 도로부터 꼽았다. 인도 한가운데를 잘라 만든 어설픈 자전거 길은 보행자마저 위협한다. 일상에서 자전거를 생활화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고 지적했다.
"자전거는 지금 목숨 걸고 타야 하는 수준이에요. 동천 쪽은 좀 낫지만 늘 그 길만 다닐 순 없잖아요. 연향동이나 금당 쪽은 언덕도 많고 차도 많아요. 형식적으로만 만들어 놓은 자전거도로가 많아서 사람도 불편하고 자전거도 불편해요. 저도 사고 날 뻔한 적이 있어요. 진짜 대자보 도시를 만들려면 도로부터 고쳐야 해요."
민혜씨가 지적한 건 자전거만이 아니었다. 버스 역시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저상버스 도입이 추진되고 있지만 정작 어르신이 많은 지역에서는 도로 사정 탓에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있었다.
"정책은 저상버스로 가고 있는데, 어르신들이 많은 지역은 도로가 안 좋아서 저상버스가 다니기 어렵대요. 그러면 도로를 고쳐야죠. 새 도로는 잘 놓으면서 왜 버스를 위한 도로는 안 고치는지 모르겠어요."
교통 문제에 대한 지적은 지역 행사 이야기로도 확장됐다. 시민들이 모이는 잔치나 축제, 공공행사에서조차 안내문의 중심은 늘 '주차장 위치'였다.
"지역 행사 안내를 보면 대부분 주차 얘기뿐이에요. 그런데 결혼식 청첩장에도 버스터미널이나 대중교통 안내를 넣잖아요. 그런 것처럼 지자체가 먼저 대중교통 이용을 권하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버스를 더 타게 되면 시스템은 더 좋아질 수밖에 없고, 그게 결국 선순환이라고 생각해요."
지난 2021년부터 1년간 직접 설치·관리한 아파트 우유팩 수거함. 이민혜씨 제공 단순하게, 느리게
그가 이런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한 삶'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 단순한 삶이 가능하게 한 선택이었다.
"1.5도씨 프로그램에서도 '바쁘게 살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었어요. 바쁜 직장생활을 할 때는 매일 차를 가지고 다니면서 '기후 우울증' 같은 게 왔었어요. 하루에 서울·수원·인천을 다녀야 하는 일정이라면 차 없이는 불가능하잖아요. 저는 그런 일정을 아예 잡지 않아요. 그래서 버스를 탈 수 있는 거예요. 일부러 많은 일을 하지 않으려 하고, 생활을 단순하게 하려고 해요."
그는 오래된 물건을 고쳐 쓰는 시간을 오히려 행운이라 여겼다.
"구멍 난 양말을 꿰매고, 떨어진 슬리퍼를 고쳐 신어요. 버리고 새로 사는 게 더 편하겠지만, 저는 고쳐 쓸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게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이런 삶을 지켜가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그는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당부했다.
"평생 고기를 안 먹겠다, 차를 안 몰겠다고 결심하지 않아도 돼요. 오늘 한 번 고기 없는 메뉴를 고르고, 오늘 한 번 버스를 타보는 거예요.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게 낫죠. 그 뿌듯함이 다음을 가능하게 해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하면 세상은 변할 수밖에 없어요. 저는 가볍게, 자기 삶에 맞게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